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흐마드 샤 마수드 (문단 편집)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19.cafe.daum.net/download.php?grpid=AqeX&fldid=20k&dataid=3371&fileid=3®dt=20050911212729&disk=35&grpcode=bulkot&dncnt=N&.jpg|width=100%]]}}}|| ||<-2> '''{{{#febe00 무자헤딘 활동 당시의 마수드}}}''' || 1978년 아프가니스탄의 인민민주당이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자 마수드는 자신의 고향인 판지시르 계곡에 본거지를 구축하여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9년, 소련군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자신들의 꼭두각시 카르말 정권을 출범시켰고 마수드는 이에 대항한다. 마수드는 크게 4단계의 전략적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민중들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 군대 양성 1. 비정규전의 수행과 그 동안 거점인 판지시르의 적극적 사수 1. "전략적 공세"로 마수드의 군대가 아프가니스탄 북부 대부분을 제압 1. 1~3단계 계획을 아프가니스탄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킨다. 1980년, 마수드는 파키스탄 쪽의 루트로부터 어렵게 입수한 700여 정의 구식 소총과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은 1,000여 명에 불과한 병사들을 이끌고 무자헤딘 활동을 시작하였다. 말이 좋아 게릴라지 난민이나 마찬가지였던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은 마수드의 지도를 거치면서 한창 전쟁이 격화되었던 1984년에는 5,000명의 강병으로 탈바꿈했다. 종전된 1989년, 마수드 휘하 무자헤딘의 수는 무려 '''13,000명'''에 이르렀다. 놀라운 것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부르하누딘 라바니]]나 [[이스마일 칸]] 등 다른 무자헤딘의 지도자들은 아프간 밖의 해외 망명국이나 [[소련군]]의 공세가 덜한 아프가니스탄 서부와 남부 지역들을 근거지로 자리잡고 소련 및 소련의 지원을 받는 카르말 정부군과 싸운데 비해 마수드가 근거지로 삼은 [[판지시르]] 계곡은 소련의 유일한 보급로가 지나가는 북동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전쟁 내내 [[소련군]]은 자신들의 유일한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는 마수드를 최우선 제거대상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마수드와 그 휘하의 무자헤딘에 활약에 학을 뗀 소련군이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를 때려잡겠다고 [[스페츠나츠]]를 포함하여 만 명 단위의 병력을 동원하고 [[폭격기]]까지 투입해서 대공세를 가한 횟수만 무려 9회였다. - 당시 카불 방송이나 소련군 발표에서 마수드의 체포 또는 제거를 거짓으로 보도한 것만 세 차례였다. - 하지만 소련군은 마수드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마수드에게 역관광만 당하기 일쑤였다. 마수드는 외부의 지원은 거의 받지도 못 하고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와 정면에서 맞붙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린 것이다. 1982년에 행해진 5차, 6차 공세에서 소련군은 30,000명의 병력과 200여 대의 헬기, 그리고 아프간 카르말 정부군까지 투입하며 판지시르에 대한 재공격에 나섰지만 3,000여 명 이상의 사상자만 발생했고, 이 와중에 아프간 카르말 정부군 1,0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투항해버렸다. 판지시르 무자헤딘 전부를 무장시키고도 남을 무기와 물자까지 빼앗겨버린 건 덤. 마수드에게 물자를 조공한 꼴이 되어버린 소련은 육로 수송을 대폭 축소하고 대신 항공 수송을 크게 늘린다. 당연히 소련의 전비 부담은 더 커졌다. 1983년, 소련은 마수드에게 정전을 제안하였고 마수드는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소련의 속셈은 일단 자신들의 전력을 재정비하고 다른 곳부터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 기간을 적절히 사용한 것은 오히려 마수드였다. 1983년 7월 마수드는 파르완, 라그만, 카피사, 쿠나르, [[바다흐샨]], 타하르, 바글란과 쿤두즈를 포함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8개 주의 130명의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모았고, 그 곳에서 무자헤딘들의 행동을 확실히 조절하기 위한 군사 협의체인 감독 의회(Shura-ye-nazar)를 창설한다. 감독 의회를 통해 마수드는 정치적, 인종적인 문제로 분열되어 있어서 각자 움직이던 무자헤딘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한다. 나중에 감독 의회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그에 저항한 [[북부동맹(아프가니스탄)|북부동맹]]의 뼈대가 되었다. 이로써 마수드의 영향력은 본거지인 판지시르를 넘어 타하르, 발흐 주까지 뻗어나갔고 친소 카르말 정권은 기겁하며 소련군에게 판지시르에 대한 공격재개를 요청한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하기는 소련군도 마찬가지였고 아예 마수드 세력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Tu-16]] 폭격기를 동원하여 판지시르 계곡에 전략 폭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마수드는 이미 카르말 정권에 침투시킨 첩자로부터 이 사실을 전달받았고 소련군의 폭탄은 50,000명의 거주민이 모두 떠난 텅 빈 계곡에 떨어졌다. 1984년, 소련-공산 아프간 군은 21,000여 명이 동원된 7차 공세를 시작했으나... 무자헤딘 5,000여 명의 반격에 2,5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후퇴해야 했고,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아프간 카르말 정부군 5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한 데 이어 정부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막장 상황에 이른다. 결국 소련측은 1986년 판지시르에 대한 공세를 중단, 1988년 즈음 소련군은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소련군은 마수드를 상대로 매우 무력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소련군 장성들이 마수드와 내통하여 작전을 모두 알려주었다는 설이 있다.''' 이건 마수드가 종전 이후 직접 러시아 기자들에게 밝혔고, 마수드를 오래 취재해왔던 다큐멘터리 작가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는 그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퐁피이가 저술한 <판지시르의 사자 마수드> 참고. 이에 대해 퐁피이는 그들이 러시아의 명예를 지켰다고 평가했다. 비록 신변 보호 차원에서 마수드가 누가 내통했는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장성쯤 되는 자들이 적과 내통, 그것도 매수하거나 종전 후 이권을 보장해줄 위치가 아닌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들과 내통했다는 것에 비추어볼 때 타당한 평가다. 당시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도의적인 문제뿐이었다. 이 시기 마수드는 서방의 지원을 거의 못 받았는데 그 이유는 [[파키스탄]] 정보부 ISI의 농간과 [[미국 중앙 정보국|CIA]]의 삽질, 그리고 영어를 몰랐기 때문[* 하지만 영문 위키피디아의 서술에 의하면 1980년대에 이미 미국 정계에 연줄이 있었고, 마수드 본인의 영어 독해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정말로 영어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시 당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 제한적 상황에서 저 정도의 활약상을 펼친 것이다. [[인도]]와 대치 중인 파키스탄은 자신들의 배후인 아프가니스탄을 우호국 내지는 위성국으로 만들고 싶었고 자국 내의 상당수 존재하는 민족인 파슈툰족을 지원했다. 허나 마수드는 [[타지크|타지크족]]이라는 이유로 변변한 지원을 못받았다. 일례로 미국이 휴대용 대공[[미사일]] [[FIM-92 스팅어|스팅어]] 1,000여 기를 지원하면 파키스탄은 그 절반을 떼어먹었고, 나머지 분량이 퍄슈툰족에게 전해지면 또 그중 불과 몇십 기만이 마수드에게 보내졌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헤크마티아르 등은 대 소련 투쟁보다는 기반 유지와 보신에 더 급급했고 이는 소련 철수 이후 파키스탄이 그들 대신 [[탈레반]]을 지원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게, 파키스탄의 정보부 말만 듣고 방관하였고, 그 때문에 마수드에게 호구잡힌 구소련이나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마수드와 접촉에 어려움이 없었던 [[프랑스]] 측에서 마수드에 대해 더 잘 아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 예로 미국 매스컴이 프랑스 매스컴에게 아프가니스탄 게릴라 취재 도움을 요청하자 프랑스 측에서 마수드와 연결해주겠다 하니 [[영어]]를 못 하는 사람이라고 영어를 하는 게릴라 지도자를 찾아달라고 하는 황당한 일이 있기도 했다. 이건 CIA도 마찬가지... 이 삽질은 훗날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터져 나왔다. 국방 TV에 방영했었던 한 미국 다큐에서 언어문제 등으로 고용한 현지 정보원이 탈레반의 이중첩자인 줄 모르고 CIA 고위간부 등 10여 명 있는 곳에 들여 보냈다가 자살폭탄조끼로 증발해 버린(...) 참사를 겪었다. 당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세계적인 헤로인 생산국가, 탈레반 - 이와 같은 것 모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무지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될 정도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막장 상태는 더할 나위 없고. 미국이 파키스탄의 ISI를 통해 지원을 한 것은 소련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지만, 미국 CIA가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조직들을 지원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영어를 할 수 있느냐'였다. 때문에 두고두고 미국의 골치를 썩이는 헤크마티아르는 영어를 그나마 안다는 점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고, 마수드는 영어를 몰라서 지원은 고사하고 거의 듣보잡 취급을 당했다. 심지어 때로는 헤크마티아르와 ISI에서 조작한 정보로 인해 마수드를 경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마수드 자신도 미국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을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애초부터 마수드는 자신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이 외세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서방 세계에 교육이나 의료, 식량 등 민간 지원은 여러 차례 호소했지만 군사적 지원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꼭두각시 정부를 세운 소련이나 이를 핑계로 무자헤딘에게 무기 지원을 하려는 미국이나 영국, 파키스탄 모두 똑같은 외세로 봤기 때문이다. 마수드가 [[탈레반]]을 적대시한 이유 중 하나가 1990년대에 파키스탄을 통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였다. 탈레반이 이웃 국가인 이란을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엔 미국이 탈레반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소련이라는 강력한 적과 대치하고 외부의 변변한 지원도 없었음에도 마수드는 주민들에 대한 배려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 점에서 마수드는 다른 무자헤딘 세력들이나 탈레반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마수드는 판지시르를 비롯한 그의 통치 하에 있는 지역에 법과 명령을 요구할 수 있는 관리 시스템을 구성했다. 판지시르는 군사 지도자와 민간 관리인에 의해 통치되었고 판사, 검찰, 관선변호인을 가지고 있는 22개의 구역으로 다시 나뉘었다. 주민들을 위한 정책은 여러 위원회를 통해 실행되었다. 주요 위원회를 살펴보면, * 경제위원회 - 해당 지역의 경제와 전쟁자금 마련, 단 주민들에게 걷는 세금은 최대한 주민들에게 돌아가도록 배려하였고 전비는 주로 [[에메랄드]] 수출[* 판지시르 지역에서는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콜롬비아]]산과 거의 동급의 에메랄드가 많이 산출되었다.]로 얻는 수익으로 충당되었다. * 건강위원회 - 국제의료구호( Aide médicale internationale) 등 외국 인권 NGO의 지원 등을 받아 병원 운영과 의료 서비스 제공 * 교육위원회 - 학생들을 위한 교육시설 운영, 군대 양성과 관리 간부 육성 * 문화위원회, 선전위원회, 사법위원회 등 마수드가 통치한 지역에는 수도와 전기시설, 이슬람식 남녀공학 초등학교와 12개의 의원(醫院), 그리고 외과 수술도 가능한 세 개의 종합병원까지 있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 철수 이후 나지불라 정권과 무자헤딘 세력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1989~1992) 당시 무자헤딘 점령지역들 중 그나마 주민들이 살 만했던 곳이 판지시르 등 마수드가 장악한 지역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